선부군(先府君‥돌아가신아버님)께서는 이름이 두규(斗圭)요 자(字)는 현보(玄甫)이시니 고려 한림학사 호 초당이신 휘 빈(邠)의후손이시다。이조에는 익대공신 함산군 휘 원보(元寶)께서 계셨고 그 후에 휘 인경(仁敬)이 계시니 삭주부사(朔州府使)ᅳ이었고、휘근(瑾)이 계시니 강서현령으로서 모두 공의 먼 조상이시다。여러번 난리를 지내오매 시골로 낙향하여 대대로 면천 남쪽(沔陽)의 죽동리에 사시게 되매 인조 때에 이르러 휘 광훈(光勳)에서 무과에 오르시니 이 분이 공의 고조부요 증조의 이름은 세규(世規)요 조부의 이름은 정화(廷華)요 아버님의 이름은 흡(熻)이요 어머니는 진주강씨이다。 영조 무오년 十월 二十四일생으로 공께서 겨우 세 살에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외로워 의지할 곳이 없었으나 안으로는 어머니가 좋은 방향으로 가르치고 밖으로는 조부님(王考)께서 독실한 행실로 가르치셨다。어려서부터 이미 특이한 자품(姿稟)이 있더니 자라매 남원윤공의 문하(門下)에서 공부하시고 효도와 우애틀 돈독히 하더니 十六세에 조부상을 당하여는 승중(承重孫)의 예를 다하셨다。어머님을 받들매 아버님 같이 하시고 드디어 과거 보려하지 않고 오로지 실천으로써 힘쓰시었다。 나이가 늙으시매 정자를 아미산 서쪽에 짓고 숨어 사시면서 의(義)를 행하셨고 선조를 받들고 후손을 돕는 일에는 지극히 정성를 쏟으셨고 여러 일가와 함께 계(敦宗稧)를 만들어서 위토를 장만하여 제사 지내는 자본(粢盛之資)을 만드셨으며 다시 묘비를 세워서 깉이 추모케 하셨다。또 족보를 만드는 의논에도 더욱 정성이 간절하셨으나 뜻을 펴 보실 겨틀도 없이 불행히 천수가 다하여 기사년 十二월 十일에 돌아가시니(正寢) 슬프도다。 공께서 풍채와 거동이 엄연 위대하시고 품으신 포부와 그릇이 크셔서 선대의 휼륭(世烈)함을 잇지 못함을 슬퍼하시고 항상 마음 속이 넓으사 세상을 다스릴 자질이 있으셨으나 그 포부를 펴시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외로운 나의 일생토록 느껴 울게 되는 일이로다。초취이신 안동김씨는 익원공(翼元公) 사형(士衡)의 후손으로 두 아들울 낳으시니 이름이 재천(戴天) 재도(載道)이었으나 모두 일찍 죽었고 계배인 예천임씨는 서하공(西河公) 춘(椿)의 후손이니 二남 一녀를 낳으셨다。아들은 재묵(载默) 재현(載鉉)이요、딸은 완산이씨 정봉(廷鳳)에게 시집가다。 서기 一八六四年 갑자 월 不肖子 載鉉 泣血謹狀